K-그라피 이길주 기자 | 강물은 흐르다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다. 정호승의 시 「봄길」은 이처럼 상실의 언어로 시작한다. 그러나 시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이는 자리에서, 시인은 ‘보라’고 말한다.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 이경진 작가의 작품은 이 시의 핵심 문장을 회화적 사유로 확장한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검은 획은 길이자 숨이며, 멈춤과 진행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이다. 번짐과 여백은 끝과 시작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고, 붉은 매화는 사라짐 이후에도 남는 감정의 온기를 상징한다. 꽃잎은 흩어졌지만, 그 흩어짐 자체가 봄의 방식임을 말하듯 화면은 고요하다. 이 작품에서 ‘길’은 목적지가 아니다. 돌아오지 않는 새들처럼, 다시는 같지 않을 시간의 인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걷는 이를 화면 중앙에 세운다.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스스로 사랑이 되어 걷는 사람. 그것이 봄의 윤리이며, 인간의 품격이다. K-그라피의 미학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글씨는 읽히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획은 감정의 밀도이고, 번짐은 기억의 방식이며, 여백은 침묵의
K-그라피 이길주 기자 | 이 작품은 크고 극적인 결말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고 구체적인 바람을 건넨다. “하루에 한 번쯤은 누군가 무릎을 탁 칠 수 있고, 누군가의 하루가 따뜻함으로 채워지면 좋겠다.” 김학주의 시는 인생의 결론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것은 태도의 축적에 가깝다. 조윤민 작가의 K-그라피는 이 태도를 가장 다정한 이미지로 번역한다. 작품 속 기린은 고개를 낮춘다. 가장 키가 큰 동물이 가장 낮은 자세로 다가오는 장면이 대비가 작품의 윤리다. 높이의 상징인 기린이 낮아질 때, 돌봄은 비로소 가능해진다. 엄마 기린의 눈빛과 아기 기린의 체온이 맞닿는 순간, 시의 문장은 더 이상 추상이 아니다. 지혜는 설명이 아니라 몸짓이 된다. 먹으로 적힌 문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하루의 호흡을 닮는다. 급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으며, 한 줄 한 줄이 ‘숨 고르기’의 리듬을 유지한다. 색채는 파스텔처럼 번져 따뜻함을 남기고, 여백은 말하지 않은 친절의 자리를 비워 둔다. 이 작품의 ‘해피엔딩’은 결말이 아니라 과정의 품격이다. K-그라피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글과 그림의 협업을 넘어선다. 글씨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관계의 온도
K-그라피 이성준 기자 | “모든 것은 때가 있으니 흘러가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은 삶의 본질을 꿰뚫는 단정한 진술이다. 소예 김나은 작가의 이 작품은 조언이나 교훈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시간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작품을 펼쳐 보인다. 검은 먹은 한 번에 멈추지 않는다. 굵고 무거운 획은 잠시 머물다 흐르고, 번짐은 의도하지 않은 흔적으로 남아 또 다른 시간의 결을 만든다. 화면 위에 점처럼 흩어진 먹의 얼룩은 멈춤이 아니라 속도를 늦춘 흐름이다. 인생이 늘 직선으로만 나아가지 않듯, 이 작품의 획 또한 곧고 단정하지 않다. 비틀리고 흔들리며, 때로는 낮게 가라앉는다. 상단의 형상은 인간의 자세를 연상시킨다. 숙이거나, 짚거나, 건너는 몸짓. 그것은 도착의 순간이 아니라 건너가는 과정의 한 장면이다. 작가는 그 장면을 고정하지 않는다. 대신 화면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곡선의 획을 통해 말한다. 삶은 한 지점에서 완성되지 않으며, 의미는 도착이 아니라 흘러가는 태도에서 생겨난다고... K-그라피의 언어로 보자면, 이 작품에서 글씨는 문장을 전달하는 기능을 이미 넘어섰다. 획은 말이 되기 이전의 호흡이고, 먹은 감정이 아
K-그라피 이성준 기자 | 이 글씨 앞에 서면, 우리는 먼저 ‘읽지’ 않는다. 대신 느낀다. 글자는 의미로 다가오기 전에, 기류氣流처럼 몸에 닿는다. 김태곤 작가의 ‘바람의 자유’는 문장을 쓰지 않는다. 그는 바람이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먹은 획이 아니라, 숨의 방향으로 번지고 색은 칠해진 것이 아니라 스며든다. 붉은 바탕은 고요하지 않다. 마치 오래된 시간 속에 쌓인 기억처럼, 번짐과 얼룩은 질서 없이 겹쳐 있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푸른 획, 그 획은 결코 단정하지 않다. 흔들리고, 갈라지고, 멈칫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안정함이 이 작품을 자유롭게 만든다. “꽃잎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바람 속에 먼 바다도 파도소리가 들린다.” - 지안스님 詩 중에서 시의 문장은 작품 아래에 조용히 놓여 있지만, 실은 이미 화면 전체에 흩어져 있다. 글씨는 꽃잎이 되고, 꽃잎은 나비가 되며, 나비는 바람을 따라 사라진다. 이 작품에서 ‘바람’은 자연이 아니다. 집착을 내려놓은 상태,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 마음, 머무르지 않으려는 의지다. 그래서 이 글씨는 말한다. 자유란 더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붙잡지 않는 것이라고. 작가 노트 | 김태곤 명인 나는 글자를 쓰기보
K-그라피 이길주 기자 | 이 작품은 위로를 서두르지 않는다. 이현희 작가의 K-그라피 ‘희망공부’는 먼저 어둠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라는 정희성의 문장은, 희망을 낙관이나 주문으로 오해해온 우리에게 조용하지만 단단한 질문을 던진다. 깊은 남청색 바탕은 밤하늘이자 인간의 내면이다. 별처럼 흩뿌려진 미세한 빛들은 희망의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이 충분히 깊을 때만 드러나는 존재의 증거다. 화면 상단의 ‘희망공부’는 금빛에 가까운 중후한 채색으로 쓰였다. 이 대비는 명확하다. 희망은 밤을 지우지 않는다. 밤 위에 공부하듯, 익히듯 놓인다. 중앙의 시구들은 수직으로 차분히 내려온다. 획은 서두르지 않고, 먹은 과장되지 않는다. 이는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것”이라는 시의 핵심을 시각적 리듬으로 번역한 결과다. 읽는 이는 문장을 따라 내려오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호출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설득이 아니라 동의를 얻는다. 마지막 문장,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 줄까”에 이르면, 작품은 질문을 관람자에게 건넨다. 답은 작품에 없다. 대신 별빛 같은 여백 속에 남겨진다. K-그
K-그라피 이성준 기자 | 가을의 편지는 서두르지 않는다. 김정애 작가의 K-그라피 작품 ‘남정림의 가을편지’는 ‘배달 중인 마음’이라는 시적 발상을 시각적 서사로 풀어낸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이미 도착한 감정이 아니라, 향기를 남기며 다가오는 과정이다. 작품 상단을 장악한 굵은 글씨 ‘그대’는 부름이자 중심이다. 호명은 언제나 관계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시구는 세로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며, 마음이 이동하는 시간을 만든다. “내 마음이 배달 중임을 알아주세요”라는 문장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기다림에 대한 예의다. 국화는 이 작품의 핵심 상징이다. 바구니에 담긴 국화는 화려하게 피지 않는다. 대신 깊고 오래 남는 향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이는 요란한 언어 대신 묵묵히 지속되는 사랑의 태도와 닮아 있다. 먹의 농담과 국화의 담담한 색채는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여백 속에서 감정을 증폭시킨다. K-그라피의 미학은 여기서 명확해진다. 글은 읽히는 대상이 아니라 도착하는 존재가 된다. 김정애의 붓은 감정을 소유하지 않는다. 다만 그 감정이 상대에게 닿을 때까지의 거리와 속도를 정직하게 그려낸다. 이 작품은 그래서 고백이 아니라
K-그라피 이성준 기자 | 별은 밤에 태어나지만, 새벽별은 끝을 알고 있는 빛이다. 김경 작가의 K-그라피 작품 ‘정승호의 새벽별’ 은 이 미묘한 시간의 감각을 화면 전체에 풀어낸다. 깊은 남색과 푸른 층위가 원을 이루며 번져가는 배경은 우주이자 마음의 심연이다. 그 위에 놓인 굵은 붓의 ‘새벽별’은 반짝임이 아니라 의지에 가깝다. 정승호의 시는 묻는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김경은 이 질문을 장식적 별빛이 아닌, 무게 있는 획으로 답한다. 글자는 흘러가지만 무너지지 않고, 번지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새벽이 밤을 배반하지 않듯, 희망 또한 고통을 지우지 않는다는 태도다. 작품 곳곳에 흩뿌려진 금빛 점들은 별이자 시간의 파편이다. 그러나 중심은 언제나 하나, 크게 쓰인 제목부에 있다. 중심을 향해 모든 문장이 수렴하고, 다시 바깥으로 호흡한다. K-그라피의 미학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시의 정서가 붓의 운동으로 전환되는 순간, 읽는 행위는 바라보는 행위가 되고, 바라봄은 스스로를 견디는 시간이 된다. 이 작품은 위로를 서두르지 않는다. 새벽별은 밤을 단숨에 밝히지 않는다. 다만 “곧 아침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가장 조용히 알
K-민화 강경희 기자 | 대한민국 초고령 103세 혁필 연구가 남상준 선생은 1965년부터 1984년까지 중국·일본 문자와 영어 알파벳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혁필화 연구와 개발에 매진하며 예술적 기틀을 다졌습니다. 1977년 이후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마이애미, 뉴올리언스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혁필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쌓았습니다. 2000년대에는 일본 오사카를 비롯한 전국 백화점과 축제에서 순회 전시 및 시연을 통해 전통 예술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고, 국내외 교민들을 대상으로 혁필을 가르치며 전통 계승에 힘써 왔습니다. 또한 서울특별시 전통문화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교육과 전시를 이어왔으며, 2023년에는 서울공예박물관 등에서 초청 교육을 진행해 혁필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오랜 세월 한결같이 전통예술을 대중과 다음 세대에 전해온 그의 행보는 한국 전통문화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교육 공간 및 운영 안내 이번에 세계평화미술대전 조직위원회는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 81, 두산위브 12층에 교육 공간을 마련하고, 이를 남상준 명인에게 무상 개방합니다. 수강생 모집: 수시 모집 수업 일정: 월·화·금·토요일 오후 2시~5시 장소: 종각역 1번
K-민화 이존영 기자 | 민화에서 물고기는 늘 ‘과정’의 상징이었다. 아직 하늘을 날지 못하지만, 이미 하늘을 향해 몸을 틀고 있는 존재이다. 정선영 작가의 '금입은어변성령도'은 그 결정적 순간을 원형의 우주 속에 봉인한다. 검은 바탕 위에 금빛으로 떠오른 원은 경계이자 약속이다. 이 원 안에서 물고기는 단순한 생물이 아니다. 파도를 가르는 몸짓은 수행의 반복을 닮았고, 비늘 하나하나는 시간의 층위를 이룬다. 물결은 쉼 없이 겹치며, 용문을 향한 의지는 흔들림 없이 축적된다. 여기서 ‘변變’은 돌연한 기적이 아니라 견딘 시간의 합이다. 주목할 것은 입에서 피어오르는 구름과 불꽃의 결이다. 아직 완전한 용의 형상은 아니지만, 이미 숨은 바뀌었다. 이는 결과를 앞서 보여주지 않는 민화의 미덕이다. 대신 가능성이 현실을 밀어 올리는 압력을 그린다. 그래서 이 그림의 긴장은 과장되지 않고, 도약은 소란스럽지 않다. 금입金入의 선택 역시 의미심장하다. 금은 부의 표식이 아니라, 인내가 끝내 획득한 광채다. 검은 바탕과의 대비는 ‘빛나기 위해 어둠이 필요하다’는 오래된 진실을 환기한다. 원형 구도는 시작과 끝을 지우며, 도약이 곧 순환임을 말한다. 오르는 자는 다시 흐
K-민화 이존영 기자 | 해와 달은 원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러나 민화는 종종 그것들을 땅으로, 삶의 자리로 내려앉힌다. 김정연 작가의 '일월수상도'에서 해와 달은 더 이상 먼 천체가 아니다. 나무의 꼭대기에 머물며, 생명의 시간과 호흡을 함께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수壽의 나무’가 서 있다. 깊은 뿌리와 굳건한 몸통은 세월을 견딘 존재의 형상이고, 그 위로 펼쳐진 잎들은 축적된 생의 결과다. 해와 달은 그 위에 겹쳐지며 낮과 밤, 시작과 끝을 나무 한 몸에 포개 놓는다. 이는 장수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순환의 완성임을 말한다. 상단을 채우는 오방색 구름은 역동적이되 과하지 않다. 구름은 흐르며 바뀌지만,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변화와 지속의 균형이 화면 전체를 지탱한다. 산은 낮고 반복되며, 물결은 고요하게 이어진다. 모든 요소가 자기 자리를 지킬 때, 세계는 소란 없이 오래 간다. 김정연 작가의 색은 선명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강렬한 원형의 해와 달은 시선을 붙잡되, 나무의 생명력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이 한 곳에 쏠리지 않는 민화의 미덕이다. 중심은 위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오늘 우리는 장수를 숫자로 계산한다. 그러나 '일월수상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