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그라피 이존영 기자 | 김소현의 詩 「꽃의 자리」는 삶의 태도를 묻지 않는다. 대신 삶이 이미 보여주고 있는 방식을 가만히 가리킨다. 꽃은 자신이 왜 피어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햇빛이 머무는 방향으로, 아주 조금씩 몸을 기울이며 자기 몫의 시간을 건너간다. 이 조용한 문장은, 우리가 너무 자주 잊고 사는 삶의 자세를 정확히 짚어낸다. 조진원 작가의 K-그라피는 이 시의 세계관을 ‘중심’과 ‘기울기’로 시각화한다. 화면 한가운데 놓인 둥근 꽃의 자리, 그 원은 무대가 아니라 머무름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 노란 꽃들은 경쟁하지 않는다. 더 앞서 피어나려 하지도, 더 크게 보이려 애쓰지도 않는다. 각자의 위치에서 빛을 받아, 각자의 속도로 시간을 통과할 뿐이다. 먹으로 쓴 글씨는 단정하지 않다. 오히려 숨을 고른 흔적처럼 보인다. 힘을 빼고, 속도를 늦춘 획들은 ‘설명하지 않음’의 미학을 따른다. 이 작품에서 K-그라피는 말한다. 의미는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고... 그래서 이 작품은 주장하지 않는다.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나의 장면을 놓아둘 뿐이다. 그 장면 앞에 선 우리는 깨닫는다. 꽃의 자리는 정해진
K-그라피 이존영 기자 | 김학주의 詩 「쇠별꽃」은 존재의 서열을 조용히 해체한다. 잡초와 꽃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그 답을 ‘이름’이라는 단어 하나로 돌려준다. 모르면 잡초였을 것들도, 이름을 가지면 꽃이 된다. 이 단순한 문장은 삶의 가장 아픈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김고현 작가의 K-그라피는 이 시의 메시지를 ‘부르는 행위’로 확장한다. 화면을 채우는 보랏빛 번짐은 이름 없는 시간의 층위이며, 그 위에 얹힌 굵은 획은 호명呼名의 순간이다. 글씨는 단정하지 않다. 번지고 흔들린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 문장은 또렷해진다. 존재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불려서 선명해진다는 사실이. ‘피어라’라는 명령형은 강요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피어 있는 것을 인정하는 선언에 가깝다. 쇠별꽃은 크지 않고,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이름을 얻는 순간, 그 꽃은 더 이상 밟히는 대상이 아니다. 김고현 작가의 작품에서 여백은 침묵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누군가 불러주기를, 그리고 그 부름이 결국 스스로에게도 닿기를 기다리는 자리다. K-그라피의 미학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글씨는 전달을 넘어 존엄을 회복하는 도구가 된다. 이 작품은 묻지 않는다. “너는 얼마나 대단한가
K-그라피 이존영 기자 | 윤동주의 시 「조개껍질」은 버려진 것들의 침묵을 오래 바라보는 시다. 파도가 지나간 뒤 남은 조개껍질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황나현 작가의 K-그라피는 이 시의 시선을 바다 가장자리로 데려온다. 작품 하단에 흩어진 조개껍질들은 풍경의 일부가 아니라, 삶이 남기고 간 기록물이다. 붓으로 적힌 시의 문장은 단정하지 않다. 고르지 않은 획, 일부러 남긴 멈춤은 바닷가의 리듬과 닮아 있다. 파도는 늘 같은 방식으로 밀려오지 않듯, 삶 또한 같은 상처를 같은 말로 남기지 않는다. 황나현 작가는 그 불균형을 바로잡지 않는다. 대신 그대로 둔다. K-그라피의 미덕은 정리보다 수용에 있기 때문이다. 모래 위의 조개껍질은 한때 살이었고, 지금은 껍질이다. 그러나 껍질이 되었다고 해서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비어 있음 때문에, 우리는 더 오래 들여다본다. 이 작품에서 바다는 설명되지 않고, 조개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은 오히려 남겨진 여백이다. 여백 속에서 시는 읽히고, 글씨는 풍경이 된다. 이 작품은 묻는다. 살아 있음이 사라진 뒤에도, 무엇이 남는가. 그리고 조용히 답
K-그라피 이존영 선임기자 | K-그라피의 선언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렸던 우리의 감각을 다시 부르는 일이며, 오랫동안 타인의 언어로 설명해 왔던 붓 문화에 대한 주권 회복의 선언이다.
K-그라피 이존영 선임기자 | K-그라피는 단순한 글씨 예술의 변주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적 미감이 하나의 독립 장르로 분화되는 과정이며, 동시에 예술·산업·외교를 잇는 확장 가능한 문화 자산이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가, 확장 가능한가”라는 구조적 질문이다. K-그라피의 작품성: 감각·정신·구조의 완성도 K-그라피의 가장 강력한 작품성은 ‘복합성’에 있다. 문학성: 문장은 읽히는 동시에 사유를 유도한다. 시와 격언, 법문, 선언문이 작품의 핵심 언어가 된다. 조형성: 획, 여백, 먹의 농담은 회화적 완성도를 지닌다. 단순한 필체가 아니라 화면 구성의 미학이다. 철학성: 한국 사유의 핵심인 절제, 비움, 균형이 작품 안에 구조적으로 작동한다. 이는 K-그라피가 개인 취향의 공예를 넘어, **미술 시장이 요구하는 ‘담론 가능한 작품’**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장성: ‘한 점 예술’에서 ‘확장형 콘텐츠’로 K-그라피는 전통 회화보다 훨씬 유연한 확장 구조를 가진다. 원작 작품(Original Artwork) 에디션 프린트(한정판) 브랜드 협업(패션·공간·출판) 공공미술·도시 브랜딩 외교·문화
K-그라피 이존영 선임기자 | K-그라피의 선언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렸던 우리의 감각을 다시 부르는 일이며, 오랫동안 타인의 언어로 설명해 왔던 붓 문화에 대한 주권 회복의 선언이다. 우리는 너무 오래 ‘캘리그라피(Calligraphy)’라는 이름 아래에서 글을 써왔다. 그러나 한글의 호흡, 한자의 정신, 먹의 밀도, 여백의 사유는 서구의 개념어 하나로 번역될 수 없는 세계였다. K-그라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 아니라, 원래 우리의 것이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다. K-그라피의 선언 글자는 장식이 아니다. 글자는 생각의 흔적이며, 몸의 기록이며, 삶의 태도다. K-그라피에서 획은 기술이 아니라 호흡이고, 먹은 색이 아니라 시간이며, 여백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K-그라피는 묻지 않는다. “이것이 글씨인가, 그림인가.” 대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한국의 감각으로 쓰는 세계 언어다. 세계와 교류하는 비결 K-그라피가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번역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 미술이 동양을 이해한 순간들은 늘 ‘다름’을 존중했을 때였다. 추상표현주의가 동양의 선과 여백에서 영감을 받았듯,
K-그라피 이존영 기자 | 황보근형의 K-그라피 작품 「너에게 길이다」는 ‘보여주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건네기 위한 마음’으로 쓰인 글이다. 이 작품에서 ‘길’은 방향이 아니다. 도착지가 아니라 태도이며, 가르침이 아니라 동행이다. “너에게 길이다”라는 짧은 문장은 상대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내가 네 곁에서 함께 걸어주겠다.” 먹의 흐름은 단정하지 않다. 획은 흔들리고, 멈추고, 다시 이어진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안다. 이 길은 완성된 사람이 내미는 길이 아니라 같이 고민하는 사람이 내어놓은 길임을... 작품을 채운 연한 노랑과 초록의 색감은 봄의 식물처럼 말이 없다. 위로하지 않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저 “괜찮다”고, “지금 속도여도 된다”고 말하는 색이다. K-그라피는 글씨를 잘 쓰는 기술이 아니다. 삶의 문장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황보근형의 이 작품은 ‘너를 고치려는 글’이 아니라 ‘너를 기다리는 글’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선언이 아니다. 기도에 가깝다. 누군가의 하루 앞에 조용히 놓아두는 한 줄의 등불이다. 작가노트 | 황보근형 너에게 길이다. 이 글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쓴 문장이
K-민화 이존영 기자 | 민화에서 물고기는 늘 ‘과정’의 상징이었다. 아직 하늘을 날지 못하지만, 이미 하늘을 향해 몸을 틀고 있는 존재이다. 정선영 작가의 '금입은어변성령도'은 그 결정적 순간을 원형의 우주 속에 봉인한다. 검은 바탕 위에 금빛으로 떠오른 원은 경계이자 약속이다. 이 원 안에서 물고기는 단순한 생물이 아니다. 파도를 가르는 몸짓은 수행의 반복을 닮았고, 비늘 하나하나는 시간의 층위를 이룬다. 물결은 쉼 없이 겹치며, 용문을 향한 의지는 흔들림 없이 축적된다. 여기서 ‘변變’은 돌연한 기적이 아니라 견딘 시간의 합이다. 주목할 것은 입에서 피어오르는 구름과 불꽃의 결이다. 아직 완전한 용의 형상은 아니지만, 이미 숨은 바뀌었다. 이는 결과를 앞서 보여주지 않는 민화의 미덕이다. 대신 가능성이 현실을 밀어 올리는 압력을 그린다. 그래서 이 그림의 긴장은 과장되지 않고, 도약은 소란스럽지 않다. 금입金入의 선택 역시 의미심장하다. 금은 부의 표식이 아니라, 인내가 끝내 획득한 광채다. 검은 바탕과의 대비는 ‘빛나기 위해 어둠이 필요하다’는 오래된 진실을 환기한다. 원형 구도는 시작과 끝을 지우며, 도약이 곧 순환임을 말한다. 오르는 자는 다시 흐
K-민화 이존영 기자 | 해와 달은 원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러나 민화는 종종 그것들을 땅으로, 삶의 자리로 내려앉힌다. 김정연 작가의 '일월수상도'에서 해와 달은 더 이상 먼 천체가 아니다. 나무의 꼭대기에 머물며, 생명의 시간과 호흡을 함께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수壽의 나무’가 서 있다. 깊은 뿌리와 굳건한 몸통은 세월을 견딘 존재의 형상이고, 그 위로 펼쳐진 잎들은 축적된 생의 결과다. 해와 달은 그 위에 겹쳐지며 낮과 밤, 시작과 끝을 나무 한 몸에 포개 놓는다. 이는 장수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순환의 완성임을 말한다. 상단을 채우는 오방색 구름은 역동적이되 과하지 않다. 구름은 흐르며 바뀌지만,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변화와 지속의 균형이 화면 전체를 지탱한다. 산은 낮고 반복되며, 물결은 고요하게 이어진다. 모든 요소가 자기 자리를 지킬 때, 세계는 소란 없이 오래 간다. 김정연 작가의 색은 선명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강렬한 원형의 해와 달은 시선을 붙잡되, 나무의 생명력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이 한 곳에 쏠리지 않는 민화의 미덕이다. 중심은 위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오늘 우리는 장수를 숫자로 계산한다. 그러나 '일월수상도'는
K-민화 이존영 기자 | 일월오봉도는 왕의 뒤에 놓인 그림이었지만, 그 본질은 권좌가 아니라 질서의 중심이었다. 이미형 작가의 '황금일월오봉도'는 이 오래된 도상을 ‘황금’이라는 선택으로 다시 세운다. 금빛은 장식이 아니라 선언이다. 흔들리는 시대에 중심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다. 검은 바탕 위에 떠오른 원형의 세계는 닫힌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집중된 우주다. 해와 달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산은 높되 과시하지 않고, 물은 흐르되 넘치지 않는다. 모든 요소는 자기 몫의 자리를 지키며 침묵의 합의를 이룬다. 이 합의가 바로 나라의 기틀이었고, 오늘의 삶에도 필요한 기준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금빛은 ‘부’의 상징이 아니라 시간의 응축으로 읽힌다. 수없이 겹친 선과 결 위에 올라앉은 금은, 빠른 성취가 아닌 오래 견딘 결과의 색이다. 검은 바탕은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대비가 아니라, 빛이 태어나기까지의 밤이다. 밤을 통과한 빛만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화면은 말없이 증명한다. 원형 구도는 시작과 끝을 지운다. 왕의 자리는 비어 있고, 대신 자연의 순환이 자리를 채운다. 이는 권위의 공백이 아니라, 권위의 재정의다.